태종 11년(1411년)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원경왕후와 그녀의 집안은 태종 이방원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내조를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왕위에 오른 태종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수많은 여인을 들이게 됩니다.
이에 소유욕이 강했던 원경왕후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태종의 바람기와 원경왕후의 질투심으로 인해 왕실은 한시라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불화를 바탕으로 태종은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왕후의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의 탄핵에 동조하게 되고 결국 1410년 태종은 종친과 신하들의 강력한 주청에 따라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자진하라고 명하면서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이는 끝을 달리게 됩니다.
이후 이성을 잃은 원경왕후는 태종에게 불손한 말을 자주 하여 왕의 분노를 사게 되고 민무구 형제가 죽은 지 1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왕후는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에 태종은 정비 원경왕후를 대신해 내명부를 다스릴만한 여인을 간택하기 위해 1411년(태종 11년) 1명의 빈과 2명의 애첩을 두는 일빈이잉의 빈어제도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27일에 판통례문사 김구덕의 딸을 빈으로 삼아 명빈에 오르게 하고 전 제학 노구산의 딸과 전 지함주사 김점의 딸을 잉실로 삼아 각각 소혜궁주(후일 소빈 노씨)와 숙공궁주로 봉하게 됩니다.
1.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
명빈 김씨(? ~1479년)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거주지는 한양이었습니다. 그녀는 돈녕부 판사를 지낸 안정공 김구덕과 신경창의 딸인 영월 신씨와의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으로 할아버지는 고려후기 문신인 상락군 김묘였고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후기에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영창군 김승택이었으며, 남동생 김오문은 문종의 세자 시절 첫 번째 부인이자 후일 폐출당한 휘빈 김씨의 아버지였습니다.
태종 11년(1411년) 간택 후궁으로 입궁한 명빈 김씨는 태종이 재위하던 시절에 유일하게 빈의 지위에 있었던 후궁으로 평소 궁중 생활에 절도가 있었고 뛰어난 미색과 덕성으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예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기예에도 능했기에 태종이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그녀의 처소는 명빈전으로 불리게 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명빈 김씨의 할머니 여흥민씨가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와 같은 가문이자 사촌이었기에 명빈의 아버지 김구덕과 원경왕후는 외6촌, 원경왕후와 명빈은 외7촌이 됩니다. 명빈 김씨는 후사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 사료를 대조해 보면 태종과의 사이에서 숙안옹주를 낳은 것으로 추정되며, 숙안옹주는 충청도관찰사 황자후의 아들인 회천군 황유와 결혼하여 그와의 사이에서 4남을 두게 됩니다.
결혼 후에 옹주의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실록에 언급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무난한 삶을 살다가 세조 10년(1464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명빈 김씨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흑석사 아미타불상의 복장(불상 내부)에서 나온 ‘아미타삼존복장기’를 보면 세조 4년(1458년)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 명빈 김씨와 함께 왕실의 평안을 위해 흑석사 아미타삼존불상을 조성한 것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한 명빈 김씨는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불상 중 금동석가삼존불상을 비롯하여 여러 불상을 주도적으로 조성했을 정도로 불심이 깊었던 왕실의 후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초기에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가 크게 위축되었으나,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전통으로 인해 왕실의 왕비와 후궁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불상이 조성됩니다. 이때 명빈 김씨는 오랜 시간 동안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왕실과 불교계를 중재하는 큰 역할을 맡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명빈 김씨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후에도 왕들의 배려를 받으며 궁에 계속 남아 왕실의 어른으로 대접을 받았고 태종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오랜 시간 동안 내명부를 지키다가 성종 10년(1479년) 음력 6월 5일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명빈 김씨의 무덤은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있으며 호석과 곡장이 없는 일반후궁묘제의 형식으로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4호로 지정되어 동구릉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2. 태종의 후궁 소빈 노씨
소빈 노씨(? ~ 1479년)는 조선 태종의 후궁으로 생전에 소혜궁주라고 불렸으며 본관은 장연이었습니다. 그녀는 위성부원군 노영수의 손녀이자 밀직제학 노구산의 딸이었으며, 고려 우왕의 후궁인 의비 노씨가 소빈 노씨의 고모였습니다. 1411년(태종 11년) 10월 명빈 김씨, 숙공궁주 김씨와 함께 후궁에 간택되었으며 11월 소혜궁주에 봉해집니다.
태종 13년(1413년) 태종의 서6녀 숙혜옹주를 낳았고, 실록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궁궐에서 평탄한 삶을 살게 됩니다. 남편인 태종 이방원이 승하한 뒤에는 태종의 후궁들이 모여서 살았던 별궁인 영수궁에서 거처하다가 병을 얻어 질병가에 거처하였는데, 이때 딸 숙혜옹주는 모친을 집에 데려와 보살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는 건강을 되찾으며 장수를 하였고 오히려 사위와 딸보다 오래 살다가 성종 10년(1479년) 음력 10월 23일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성종은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난 명빈의 예에 따라 쌀과 콩을 아울러 70석, 면포와 정포 각각 50필, 청밀 10두, 황랍 30근, 초 10정, 공석 1백, 초둔 10을 부의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872년(고종 9년) 그녀는 정1품 소빈으로 추증됩니다.
3. 태종의 후궁 숙공궁주 김씨
숙공궁주 김씨(생몰년 미상)는 조선 태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청도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돈녕부 지사를 역임한 김점이며, 어머니 안동 권씨는 찬성공 권유의 딸이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 왕비인 원경왕후와의 사이가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당시 원경왕후는 태종을 왕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남편이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과 태종이 즉위 후 새로 들인 후궁들만 가까이한다는 점 때문에 불만이 쌓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동생 민무구가 세자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 하였다는 <민무구의 옥>으로 인해 원경왕후의 남동생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자 태종과 원경왕후의 불화는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 왕비의 폐비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태종은 원경왕후를 대신해 내명부를 다스릴만한 여인을 간택하기 위해 태종 11년(1411년) 1명의 빈과 2명의 애첩을 두는 일빈이잉의 빈어제도를 만들게 됩니다. 이는 곧바로 시행되어 같은 해 10월 27일에 판통례문사 김구덕의 딸을 빈으로 삼아 명빈에 오르게 하고 전 제학 노구산의 딸과 전 지함주사 김점의 딸을 잉실로 삼아 각각 소혜궁주(후일 소빈 노씨)와 숙공궁주로 봉하게 됩니다.
이렇게 정식으로 간택이 되어 후궁이 된 숙공궁주는 태종의 총애를 받으며 궁궐 생활을 하게 되지만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세종 3년(1421년) 아버지 김점이 평안도 관찰사 시절에 수많은 뇌물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당시 태상왕이었던 태종은 김점을 국문하고자 숙공궁주를 궁밖으로 내보내게 됩니다.
태상왕이 숙공궁주 김씨를 내보내어 친정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 궁주는 김점의 딸이다. 태상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김점의 범죄를 유사가 방금 국문하고 있는 중이니, 만약 그 딸이 그대로 궁중에 있게 되면, 공정한 의(義)와 사정의 은(恩)이 두 가지로 혐의될 것이다. 내가 이제 내보내는 것은 점(漸)을 다른 여러 사람들과 같이 대하는 것이니, 유사(有司)도 여러 사람을 다스리는 예로 다스리게 할 것이다.” <세종실록 3년 10월 19일>
지극히 총애를 받던 숙공궁주는 아무런 죄도 없이 아버지 김점의 죄로 인해 강제 출궁을 당했고, 결국 그의 죄가 사실로 밝혀지게 되자 궁주는 다시는 궁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김점은 명나라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긴 후 최초로 사신으로 갈 정도로 조정에 인정을 받은 인물이었지만 인품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김점은 성품이 우둔하고 교활하여, 매양 다른 사람과 의논이 서로 맞지 않으면, 주먹을 휘둘러 그 뺨을 겨누며, 갖은 말로써 욕하니,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다른 의견을 내지 못하였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탐욕스럽고 포악하더니, 처벌을 받고 관직을 잃자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점은 곧바로 의금부에 갇히게 되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그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세종은 김점을 서울에서 떨어진 김포의 별장으로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고, 더 이상의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김점의 집안이 4대째 조정을 위해 충성을 했다는 점과 숙공궁주의 아버지라는 것이 고려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좌의정 박은은 ‘숙공궁주는 아버지의 사건과 관계가 없으며, 아버지 김점이 밖으로 나가게 되면 궁주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마땅히 다시 후궁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지만 태종이 이를 반대하는 바람에 숙공궁주는 다시 궁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결국 숙공궁주는 아버지의 죄와 태종의 의지로 인해 궁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출가를 선택해 여승이 됩니다.
세종 4년(1422년)에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슬퍼하며 상복을 입길 세종에게 청했지만 세종은 아버지가 내친 숙공궁주는 상복을 입을 자격이 없다며 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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