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빈 박씨는 조선의 제11대 왕인 중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밀양이고, 거주지는 서울이었습니다. 경빈의 아버지 박수림은 상주의 사족 출신이었지만 장정으로 군역에 복무해야 할 정도로 매우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1505년(연산군 11년) 경빈이 남다른 미모로 ‘채홍’으로 뽑히면서 그녀의 인생과 가문의 상황이 180도 바뀌게 됩니다.
연산군은 전국의 미녀들을 ‘채홍(꽃을 딴다는 뜻으로, 미녀를 가려 뽑음을 이르는 말)’한다고 하여 채홍사를 통해 뽑아오도록 하였고, 이때 경빈도 뛰어난 미모로 인해 선발됩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 이역(중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 시기에 경빈의 미모가 반정의 제일 공신인 박원종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후궁으로 추천되었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궁으로 입궁해 내명부 종2품 숙의의 품계를 받게 됩니다. 연산군 을축년(1505년)에 채홍의 일 때문에 비로소 그 집에 아름다운 처녀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그리하여 반정한 처음에 추천되어 궁중에 들어왔는데 이 여인이 바로 경빈입니다.
중종 22년(1527년) 4월 26일 일설에는 박원종이 권력을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박씨를 수양딸로 삼아 후궁으로 들여보내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내용입니다. 경빈 박씨는 본관이 밀양이었고 박원종은 순천이었기에 애초에 같은 가문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박원종의 외조카가 같은 시기에 들어온 후궁 중 한 명인 숙의 윤씨(장경왕후)였기에 그가 굳이 외부인을 수양딸로 삼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공신들의 압박으로 인해 7일의 왕비로 잘 알려진 부인 신씨(단경왕후)를 폐위하면서 1507년(중종 2년) 간택한 3명의 숙의 중 파평 윤씨 윤여필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는데 그녀가 바로 장경왕후입니다. 참고로 간택된 후궁들은 숙의 박씨(경빈 박씨), 숙의 홍씨(희빈 홍씨), 숙의 윤씨(장경왕후)였습니다.
경빈은 비록 아쉽게도 왕비가 되지 못했지만,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1509년(중종 4년) 중종의 첫 자녀이자 아들인 복성군을 출산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정2품 소의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딸들인 혜순옹주(1512년)와 혜정옹주(1514년)를 차례로 낳으면서 왕의 후궁으로서 궁궐 내의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비인 장경왕후가 원자(후의 인종)를 출산하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1515년(중종 10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중전에 대한 간택 논의가 있을 때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인 경빈을 중전으로 삼는 것에 대한 의견이 오갔습니다.
당시 전임 왕비가 세상을 떠나거나 폐출이 되면 다음 왕비는 후궁에서 뽑아 승차하는 방법으로 정했었고 전임 왕비인 장경왕후 또한 그렇게 계비(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경빈박씨는 내심 자신이 왕비가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실제로 중종은 여러 후궁 중에서도 첫아들을 낳은 경빈을 총애했기에 장경왕후가 원자(후일 인종)를 낳고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나 중전의 자리가 비게 되자 그녀를 새 왕비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위해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는데 그중 정광필이 경빈의 왕비 책봉을 반대하고 나서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보다 앞서 곤위(왕비의 지위)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을 때 숙의 박씨(경빈박씨)가 후궁 가운데에서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장경왕후)의 예를 따라 스스로 중위에 오르고자 하였습니다. 상(중종)도 이를 따르려 하였으나 대신의 뜻이 어떠한지를 모르겠으므로, 정광필 · 김응기 · 신용개 등에게 간곡한 말로 물어서 그 뜻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응기는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신용개는 약간 허락하였으나, 정광필만이 분연히 허락하지 않으며 아뢰기를 ‘정위는 마땅히 숙덕(여성의 미덕)이 있는 명문(이름이 있는 가문)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요, 미천한 출신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박씨의 뜻은 마침내 저지되고 상 또한 새 왕비를 맞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중종 12년(1517년) 7월 22일 정광필은 경빈 박씨를 반대하면서 출신 성분을 언급했지만, 그녀를 반대한 진짜 이유는 적서의 차별이 깨지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경빈이 왕비에 오른다면 중종의 적장자가 복성군이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원래 복성군은 중종의 첫아들이자 서장자이고 죽은 장경왕후의 아들이자 당시 원자였던 인종이 적장자였는데 경빈 박씨가 왕비에 오르면 중종의 첫 번째 아들인 복성군이 대군이 되기 때문에 적장자, 인종이 적차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리학적 종법 질서에서는 한 번 정해진 상하관계가 깨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광필은 직설적으로 “왕자가 많더라도 적서와 상하의 분별은 하늘과 땅처럼 현격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아들을 둔 후궁, 즉 경빈 박씨가 왕비가 되면 적자와 서자,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이 깨진다고 경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뒤에 난 왕자도 ‘나도 정실 소생이고 저도 정실 소생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국가와 백성의 화가 마침내 막야보다 참혹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정광필은 적서의 구별이 깨짐으로 인해서 차기 왕이 누가 될지 다툼이 생기는 것을 걱정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대신들은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도 짚었습니다. 만약 경빈 박씨가 왕비가 된다면 자기 배로 낳은 아들을 미래의 임금으로 밀어줄 테고, 복성군 또한 ‘나도 적자인데 왜 내가 왕이 되지 못한단 말인가?’ 하며 야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차기 왕위 자리를 두고 조정이 두 쪽이 날 것이 분명했습니다.
또한 이 시점(1515년)에는 아직 중종이 공식적인 세자를 정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경빈이 왕비 자리에 올라 복성군이 적장자가 된다면, 중종이 그를 세자로 책봉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1517년(중종 12년) 중종은 경빈 박씨를 왕비에 올리지 않고 새롭게 왕비를 간택하기로 합니다.
그 결과 원자(후일 인종)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죽은 장경왕후와 같은 가문인 파평 윤씨 윤지임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는데 그녀가 바로 문정왕후였습니다. 경빈 박씨는 처음 궁궐에 숙의로 들어올 때 장경왕후에게 밀려 왕비가 되지 못했듯, 중종 12년에도 문정왕후에게 밀려 또다시 왕비가 되지 못합니다.
대신에 그녀는 후궁 중 최고 품계인 정1품 빈으로 승격되어 경빈에 봉해지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녀가 이에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원자(인종)에게 원한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중종은 재위 15년(1520년), 원자였던 인종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표면적으로는 후계자 문제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는 자신이 낳은 복성군을 다음 대의 왕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경빈은 수려한 미모만큼이나 자존심이 세고 시기심이 강했지만, 주변 상황에 대응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기지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경빈이 궁궐에서 확고하게 실세로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 들어온 문정왕후가 궁궐에 들어온 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들만 낳게 되자 상황은 묘하게 흘러갑니다.
왕에게 적장자가 없다면 적차자가, 적차자마저 없다면 서장자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기에 만약에 세자에게 문제가 일어나고 문정왕후가 계속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중종의 서장자인 복성군에게 기회가 찾아와 다음 왕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경빈 박씨는 자기 아들 복성군을 왕위로 앉히려고 노력을 했고 이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문정왕후와 치열한 암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렇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작서의 변이라는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중종 22년(1527년) 3월 22일, 좌의정 이유청과 우의정 심정 등이 중종을 알현하면서 지난 2월 25일, 세자(미래의 인종)의 생일에 누군가가 죽은 쥐의 사지를 찢고 불에 태워 세자의 침실 창 바깥쪽에 걸어두었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보고합니다.
중종은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면서 곧바로 사건을 조사하라 명합니다. 이튿날 조사한 결과 죽은 쥐가 동궁 거처에 매달리긴 했지만, 세자의 침실 창문 밖이 아니라 여러 전의 하인이 오가는 곳에 걸렸고 이곳은 워낙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쉽게 범인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는 정말로 주술로 세자를 해하려 했다면 은밀한 곳에 했을 텐데, 이처럼 뻔히 보이는 곳에 했으니 틀림없이 그로써 누군가 이득을 보려고 수작을 부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동궁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2월 25일(세자의 생일)에 동궁의 북서쪽 담장 밖 살구 나뭇가지 끝에 허리가 삼끈에 감겨 거꾸로 매달린 채 죽은 쥐를 목격했는데, 근처에 준치의 머리와 물푸레나무 조각도 함께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처음 이것을 본 궁녀는 누군가 액땜하고자 행한 주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궁녀들 사이에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호기심이 많은 궁녀가 이튿날 이를 찾아 쥐를 묶은 줄을 풀고 살펴보았더니, 쥐는 꼬리가 반쯤 잘렸고 주둥이와 눈코입이 모두 불로 지져져 있었습니다.
세자의 생일에, 하필이면 쥐가 동궁의 해방(북북서)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세자를 노린 주술로 판단되면서 왕대비 정현왕후(자순대비)에게 즉시 보고가 올라갔고 그녀는 근처의 통행을 막으라 명합니다. 그리고 세자의 생일만이 아니라 3월 1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 파악됩니다.
한 궁녀의 증언에 따르면 임금이 거처하는 대전의 곡란 아래에 꼬리와 네 발이 달리고 불로 지져진 쥐가 버려져 있었는데, 대전의 궁녀들이 세자궁으로 가지고 올 때만 해도 살아있었지만 금방 죽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쥐를 목격한 궁녀들은 “틀림없이 지난번에 쥐를 매단 자가 했을 것이다.”라고 수군거렸습니다.
당시 조선의 법률에 따르면,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나 죄인들을 풀어줄 때도 저주를 행하다가 잡힌 자는 풀려나지 못할 정도로 극악한 범죄로 여겼는데 하물며 왕이나 세자, 왕비 등을 저주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들은 현장을 오갔던 궁인들을 모아 형벌을 가하면서까지 조사를 했지만, 범인을 보았다는 진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경빈 박씨를 모시는 궁녀 범덕이 말실수를 하면서 파장이 커지게 됩니다. 범덕은 ‘3월 1일 홍 귀인(희빈 홍씨)은 대비전에 갔지만 경빈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쥐를 태운 자가 경빈이라고 억측하는 자들이 있다.’라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날 밤 홍 귀인과 경빈 박씨가 모두 대전에 있다가 홍씨만 대비전으로 가고, 경빈은 궁녀 범덕과 함께 계속 대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기에 대전 근처에 쥐를 버린 자가 경빈이 아니었겠느냐는 말이 궁인들 사이에서 돌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을 접한 궁녀 범덕이 자기 나름대로 모시는 주인을 변호하고자 꺼낸 말이었지만, 다른 증거를 잡지 못해 답답해하던 입장에서는 용의자가 제 발로 나선 격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일이 보고되자 중종은 충분히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며 범덕을 심문을 하라고 명합니다. 결국 그녀는 끌려가 모질게 고문을 당하면서 고된 심문받지만, 끝까지 견디면서 범행 일체를 부인합니다.
신하들은 중종에게 저주 사건의 범인을 반드시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리 조사를 해도 용의자는 범덕뿐이었고 그마저도 철저히 혐의를 부인했기에 범인을 벌하려 해도 범인이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사건 조사가 지지부진해지자 왕대비 정현왕후가 움직임을 보입니다.
대비는 4월 14일, 한글로 글을 내리면서 경복궁 침실에 버려져 있던 쥐에 관한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3월 1일) 경빈이 그곳에서 오랫동안 혼자 앉아 있었고 그녀의 시녀 범덕이 뜰 밑을 두 번이나 왕래했다는 것을 밝힙니다. 또한 3월 28일에는 경빈의 첫째 딸 혜순옹주의 시녀들이 인형을 만들어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면서 “쥐 지진 일을 발설한 사람은 이렇게 죽이겠다.”라고 저주하며 욕설했다는 사실이 있었고 이 일을 알게 된 대비는 곧바로 관련자들을 모아 추궁하니 일부는 자복하고 일부는 자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정현왕후는 다른 혐의자가 없으니 가장 의심스러운 경빈 박씨의 계집종들을 조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왕대비 정현왕후가 경빈을 직접 범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첫 번째 용의자라고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경빈 박씨와 혜순옹주를 담당하던 시비들은 추국장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며 심문받지만 모두 입을 열지 않으면서 사건은 답보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중종 22년 4월 21일, 우의정 심정은 경빈과 혜순옹주를 모시는 시비들이 6번이나 고문을 받아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죽음을 각오하고 범행을 자백하지 않으니, 이제는 결단을 내릴 시점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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