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의 말을 듣고 고심하던 중종은 범인이 누군지 모른 채 단지 의심스러운 일만을 가지고 죄를 정하는 것은 아니 된다고 반대를 하지만 다른 대신들도 거듭해서 간청하며 이 사건은 세자의 안위와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자, 중종은 마지못해 경빈 박씨를 폐서인하기로 합니다.
이후 승정원에서는 경빈을 내치기 위한 절차로 폐서인의 교지를 작성해야 했는데 당시 범인이 경빈이라고 자백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폐서인하는 사유를 뭐라고 적어야 할지 신하들은 난감해합니다. 그래서 승정원에서는 중종에게 뭐라고 적으면 좋을지 지침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중종도 할 말이 궁했는지 은근슬쩍 책임을 왕대비 정현왕후에게 돌립니다.
대비께서 경빈을 의심하는 글을 보내셨으니, 그것에 의지하여 작성하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정현왕후는 펄쩍 뛰며 자기가 경빈 박씨를 범인으로 몰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책임 또한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4월 23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대비는 중종에게 글을 보내어 ‘내가 경빈을 의심하긴 했어도 반드시 범인이라고 확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자기 뜻을 밝힙니다. 결국 작서의 변으로 인한 파장으로 중종이 경빈을 내치기로 하자 그녀는 아들인 복성군과 함께 궁궐에서 폐출되어 본가가 있는 상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또한 관직에 있던 경빈의 아버지 박수림과 오빠인 박인형, 박인정 등이 파직되었으며 범덕을 비롯하여 문초를 받았던 나인들이나 시비들도 저마다 벌을 받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경빈 박씨가 폐서인이 된 지 5년 후인 1532년(중종 27년), 유생 이종익이 옥중에서 ‘작서의 변은 경빈 박씨나 복성군과는 무관하고 효혜공주(중종의 적장녀, 인종의 누나)와 부마 김희가 김안로(김희의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벌인 일’이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면서 잊혔던 경빈이 다시 부각됩니다. 이종익은 벼슬이 없었지만, 중종에게 상소문(총 5차례)을 올릴 때마다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상소에 언급된 김안로는 당시 조정을 장악한 대신이었기에 그는 괘씸죄에 걸려 내용에 대한 진위조차도 가리지 않은 채로 당고개에서 참수당하게 됩니다.
한편 이러한 이종익의 사건과 상소를 근거로 작서의 변이 김희가 한 짓이라는 자료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정황상 그러할 만했다는 것이지 확실한 내용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당시에 사건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앞선 상소로 인해 유배를 가 있던 이종익이 도대체 누구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기에 김희가 작서의 변을 꾸민 범인이라고 주장했는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작서의 변이 일어나고 경빈 박씨 모자가 쫓겨난 6년 뒤이자 유생 이종익이 사형을 받고 1년이 지난 중종 28년(1533년) 5월 17일, 동궁의 남쪽 파자 울타리에서 또다시 저주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종이로 사람 머리를 만들어 눈·코·입과 머리카락을 목패에 꽂고 앞면에는 세 줄로 된 내용이 한자로 쓰여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만들었다.’ 하여 ‘가작인두의 변’, 또는 목패에 꽃혀 있었다 하여 ‘목패의 변’이라고 부릅니다. 상식적으로 궁중에 대놓고 왕과 왕비와 세자를 저주하는 물건을 가져다가 ‘내가 했소.’ 하고 적어둘 사람이 없었기에 조정에서는 목패에 이름이 쓰인 ‘병조 서리 한충보’를 모함함으로써 이득을 볼 만한 사람에 대해 조사를 합니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자 이름이 적힌 당사자인 한충보를 취조했는데 그가 언급한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당성위 홍여의 하인들이 일을 꾸몄다는 자백이 나옵니다. 홍여는 폐서인 된 경빈 박씨의 둘째 딸인 혜정옹주의 남편이었습니다.
자백의 내용은 홍여의 하인들이 주인의 명을 받아 왕과 세자를 저주하는 가작인두를 만들어 목패에 꽂아 설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하인들의 집에서 저주에 쓰인 목패와 재질이 같은 널빤지가 나옵니다. 결국 5월 23일, 경빈 박씨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대간들의 탄핵을 받게 되었고 중종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경빈을 사사하기로 합니다.
이렇게 왕비를 꿈꿨으며 왕의 어머니가 되고자 했던 경빈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사약을 받고 쓸쓸히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빈을 사사하고도 복성군까지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오자, 중종은 아들 복성군을 안타까워하며 어머니가 연루되었지만, 그 자신은 관련이 없으니 멀리 안치시키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말뿐이었으며 아버지로서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쉽게 내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으므로 복성군을 두둔하는 모습을 취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경빈이 사약을 받은 지 사흘 만에 중종은 복성군을 사사하고 두 옹주를 폐서인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리고 경빈의 첫째 딸인 혜순옹주의 남편 김인경을 변방으로 유배 보냈으며 둘째 딸 혜정옹주의 남편 당성위 홍여에게는 모진 고문을 가하면서 복성군이 사사 당한 날인 5월 26일에 죽게 합니다. 심지어 작서의 변 당시 겨우 화를 피한 경빈의 아버지와 오빠들도 이때 멀리 귀양을 가면서 그야말로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 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경빈이 사사를 당한 지 8년이 지난 중종 36년(1541년) 세자(인종)가 중종에게 상소를 올려 탄원하기를, 경빈이 요망한 일을 했더라도 아들 복성군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니다.
“요망한 일을 비록 박씨가 했다고는 하지만 미(복성군)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낸 것도 지나친 일인데, 그 뒤에 또다시 큰 옥사가 일어나 모자가 연이어 죽고, 홍여도 형장 아래서 죽었으니 이토록 극심한 변고는 전고에 드문 일입니다. 형제간이 된 사람의 정리로서 어떠하겠습니까. 죽은 자는 이미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미의 딸 하나가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없이 되었으니,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는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두 옹주도 나이 어린 딸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속적에서 제적되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신(세자) 하나로 인하여 형제간의 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신이 항상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실 때도 같이 화락하게 즐기지 못하여 슬프고 불쌍한 생각이 가슴에 더욱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저번에 말씀을 드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다시 충정을 아뢰어 천총을 욕되게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불쌍히 여겨주소서.”
중종 36년 11월 9일, 이에 중종은 세자의 성품과 정성을 가상히 여겨 죽은 미에게 복성군 신분을 되돌려주도록 허락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옹주 또한 신원해 줍니다. 당시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을 주도하고 실행한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세자(인종) 또한 중종에게 탄원하면서 두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다만 미(복성군)의 딸이 불쌍하게 지내니까 자신이 바라보기 괴롭다며 중종의 동정심을 자극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중종 역시 경빈과 복성군 모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공식적으로 경빈이 신원되었는지는 실록의 기록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는 경빈, 복성군, 당성위 홍려 등이 억울하게 죽은 듯하긴 한데 증거는 없고 왕의 체면 문제도 있으니, 복성군과 옹주들의 신분을 되돌려주는 선에서 수습하자는 분위기였습니다. 물론 김안로가 정말로 작서의 변이나 가작인두의 변을 사주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김안로는 세자(미래의 인종)의 사람으로 작서의 변 이후 귀양에서 풀려나자, 세자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으므로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정적들을 처리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됩니다.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 두 사건은 세자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는 눈에 보이는 물증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가장 이득을 많이 본 사람이 바로 김안로였기에 증거는 없지만, 그가 일을 꾸민 배후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제3의 인물이었던 문정왕후가 개입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합니다. 문정왕후가 중종과 가례를 올린 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딸들을 연이어 낳았으므로 불임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아들을 못 낳았다고 희망을 놓을 시기 또한 아니었기에 다음 왕위를 기대하면서 자신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경빈 박씨나 복성군이 고깝게 보였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하더라도 장차 왕위에 오를 세자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기에 김안로와 힘을 합쳐 두 모자를 찍어내고자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약을 받고 사사된 경빈 박씨는 상주에 가매장되었다가, 1571년(선조 4년) 그녀의 외손자 김호수가 선조에게 상소하자 왕명으로 묘가 개장이 됩니다.
이는 하성군(선조)이 왕위 계승자가 되기 전에 명종에 의해서 경빈의 아들인 복성군의 후사로 정해진 인연이 있었기에 그가 후일 즉위하면서 복성군의 어머니인 경빈박씨의 묘소를 돌본 것이기도 했습니다. 중종의 빈 박씨를 개장하였습니다.
빈은 복성군 이미의 어머니인데, 본디 상주 민가의 딸로서 궁중으로 뽑혀 들어와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며 아름다운 자태가 후궁을 압도하였습니다. 미(복성군)의 나이가 인종보다 많아 조야에서 혹시 적통을 빼앗지 않을까 심히 불안해하자, 김안로가 인종을 보좌하는 것으로 자임하고서 불안 요소를 정리한다는 구실로 권력을 잡고 자기에게 빌붙지 않은 사대부들을 해쳤습니다.
이에 궁인들이 서로 호응하여 박씨가 동궁을 저주했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복성군과 매서 홍려가 다 피해를 당하고 빈은 내쫓겨 상주로 돌아온 뒤에 끝내 사사되어 그 지방에 가매장하였습니다. 이때 이르러 그의 외손 김호수의 상소로 인하여 예에 따라 개장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복성군이 사사될 때 명사가 다 그 논의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김안로가 패망한 뒤에도 사람들이 그 억울함을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상(선조)이 잠저에 있을 때 명종이 명하여 복성군의 후사로 삼았으므로, 상이 특별히 휼전을 베푼 것입니다. 선조 4년 8월 1일, 경빈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에 위치해 있으며 그녀의 무덤 아래쪽에는 아들 복성군 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종실록’에 기록된 경빈 박씨에 관한 기록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경빈은 미천하고 탐욕이 많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스스로 왕비가 되길 바랐던 부분으로 인해 사관들에게 부도덕하고 불순한 인물로 여겨지면서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또한 복성군의 존재는 세자(인종)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됩니다.
경빈은 성품이 공손하지도 않고 만족할 줄도 몰라서 사랑을 얻으려는 술책만 힘썼습니다. 은총을 믿고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가 하면 분수에 넘친 마음을 품고 뇌물을 널리 긁어들였으므로 간청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러고도 전혀 경계할 줄을 모르다가 이런 화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시론은 박씨만의 죄가 아니라 역시 임금이 지나치게 총애한 소치라고 했습니다.
YouText의 콘텐츠는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