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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아끼던 여동생들 (2부) 영조의 오해로 ‘유복자’ 될 뻔한 둘째 동생

  • 지식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청선군주(1756년~1802년)는 조선의 왕족으로,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차녀이자 정조의 친여동생입니다. 그녀의 생전 작위는 군주였으며, 사후 고종황제 때 공주로 추봉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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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선군주는 1756년(영조 32년) 윤 9월에 태어났습니다. 사실 그녀가 태어났을 때에는 부모였던 사도세자와 혜경궁 모두 힘들어하던 시기였습니다.

청선이 태어나기 전해에 혜경궁 홍씨의 어머니인 한산부부인 이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한중록>에 따르면 혜경궁은 임신 상태에서 모친의 상을 치르느라 고기반찬도 먹지 않고 채소로 연명하다가 몸이 상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의 명으로 혜경궁의 아버지인 홍봉한이 보약을 썼고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면서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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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큰 사고도 일어났습니다. 혜경궁 홍씨가 청선군주를 임신한 5~6개월 경에 사도세자의 실수로 창경궁 낙선당에 불이 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낙선당은 원손이었던 정조가 있는 관의합과 매우 가까웠습니다. 이 때문에 혜경궁 홍씨는 임신한 몸으로 바삐 뛰어서 잠든 자식을 구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영조는 사도세자가 일부러 불을 냈다고 생각해 함인정에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그에게 화를 냈고, 세자는 설움이 북받쳐 저승전 앞뜰 우물에 뛰어들려고 했습니다. 이때 정말 사도세자가 잘못되었다면, 청선군주는 하마터면 유복자로 태어날 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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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선이 태어났을 당시 사도세자의 태도도 2년 전 태어난 언니인 청연군주 때와는 달랐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사도세자가 자식의 탄생을 기뻐하며 출산한 아내 혜경궁에게도 찾아와 안부를 물었을 텐데, 당시 사도세자는 이미 정신병 증세가 심각해져서인지 갓 태어난 딸도 외면했습니다.

“그해 윤 9월에 내가 둘째 딸 청선군주를 낳으니, 경모궁(사도세자)께서 전 같으면 오죽 좋아하시리 오마는 한번 들어와 보신 일이 없으니, 병환이 심하심을 가히 알지라. <한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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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혜경궁 홍씨는 17세에 의소세손을 낳고 연이어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는데, 청선군주의 탄생 이후부터는 더 이상 회임하지 않았습니다.

영조 33년(1757년) 사도세자를 아껴준 왕대비 인원왕후와 법적인 어머니인 정성왕후가 불과 1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왕실은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이렇게 사도세자를 보호하고 아끼던 왕실 여인들이 하나씩 다 세상을 떠나게 되자 왕실에 중재자가 없어지게 되면서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1762년(영조 38년)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비극인 임오화변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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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기 전 폐서인을 시켰는데, 여기서 폐서인이란 세자를 폐위하여 평민으로 만든다는 의미였기에 그의 부인이었던 혜경궁도 더 이상 세자빈이 아니었습니다. 이로 인해 어느덧 28살의 나이가 된 혜경궁은 자식들과 함께 눈물을 머금고 궁을 나와 안국동에 있는 친정으로 가게 됩니다. 당시 세손은 남여를 타고, 세손빈과 청연군주는 같이 가마를 탔다고 하였으므로, 청선군주도 가마를 타고 뒤를 따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영조는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세자의 지위를 회복시킵니다. 또한 혜경궁도 ‘혜빈(惠嬪)’이라는 빈호를 받게 되면서 자식들과 함께 다시 궁궐로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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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선군주가 11살이 되던 영조 42년(1766년) 그녀의 혼례가 결정되었고, 1월 25일 초간택, 1월 26일 재간택을 거쳐 2월 10일 삼간택에서 정인환의 아들 정재화가 부마로 낙점받았습니다. 연일 정씨인 정재화는 송강 정철의 후손인 인물로 군주와 혼인을 함으로써 흥은부위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는 부마가 된 뒤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일으켰는데, 그중에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와 관련해 일으킨 사건이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1766년 작은딸 청선의 남편 흥은부위 정재화가 부마가 되니, 용모와 행동이 아름다운지라. 세손이 매부를 예쁘게 보시더니, 1769년 사이 그 아이가 빗나가 별감들을 데리고 외입이 무궁하고, 세손 체면을 깎는 일도 많더라. <한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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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재화는 궁성의 경호를 맡은 오위도총부의 총관으로 숙직을 설 때마다 세손이었던 정조를 만나서 어울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혜경궁에게 알린 사람이 바로 영조가 아끼던 딸이자 혜경궁이 가장 경계했던 인물인 화완옹주였습니다.

화완옹주는 “이번 잔치에 지방에서 올라온 기녀 얘기도 세손께 전하고, 잔칫날 자기가 가까이한 계집도 보시게 하고, 자기가 사귄 별감들도 소개한다.”라고 전했는데, 이것을 보고 미뤄 짐작해 보면 청선군주가 남편 때문에 꽤나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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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49년(1773년)에는 언니 청연군주와 당시 궁녀였던 의빈 성씨(정조의 후궁) 등과 함께 소설을 필사했는데, 이는 당시 왕실 여인들의 취미생활이 독서와 필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1790년(정조 14년) 남편 정재화가 먼저 사망하면서 청선군주는 오랫동안 홀로 지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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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남편 정재화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정의로, 정조 말기에 음보로 벼슬길에 나갔습니다. 정의는 정조 사후 수원판관을 지내며 정조의 초상을 모신 화령전의 최고 책임자를 맡게 되었고 동부승지와 여주목사, 형조참판 등을 지냈습니다. 그는 성격이 밝고 시와 서화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국조전고에도 통달했다고 전해집니다.

1795년(정조 19년) 정조가 화성행차를 할 때 아들인 정의가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어머니 청선군주를 모시고 두 여동생과 참석해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열린 외할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축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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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빠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802년(순조 2년) 음력 7월 20일 그녀는 향년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청선군주가 죽자 순조는 매우 비통해하며 그 장례를 특별히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고 좋은 관을 골라 보내도록 했습니다.

“천붕지통(아버지 정조의 죽음)을 만난 이후로부터 의지하고 앙모하는 정이 더욱 깊었는데 어찌 오늘날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소자의 비통한 마음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지만 자궁(혜경궁)의 늠철(凛綴)한 가운데의 정리(情理)는 장차 무슨 말로써 위로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인가? <순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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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일찍 죽어 신세 그릇되니, 이는 어미 운명과 흡사하다.”라고 말했는데, 안타깝게도 정조처럼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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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청선군주와 정재화 내외의 유물 1,014점이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그들의 후손들이 기증을 했는데 조선 왕실 부마 유물을 대거 기증한 첫 사례였습니다. 부마의 초상화와 출가한 왕실 여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하나같이 진귀하고 가치가 높은 유물들로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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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화 가문 관련 한글 편지는 총 151편으로, 혜경궁 홍씨와 그의 외손자 정의, 정의의 아내 연안 김씨, 정조와 효의왕후 등의 편지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정조의 한글편지입니다. 자신은 더위에 앓고 있다며 무더위에 안부를 묻는 내용으로 “그 사이 잘 지내느냐? 본지 오래니 섭섭하다.“라며 200여 년 전, 조선 정조가 여동생 청선군주에게 보낸 편지 내용입니다.

또한 정재화 초상화는 사실상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부마 초상화로 용무늬 비단에 실로 짠 것처럼 표현되었으며 보존도 양호해 보물급 자료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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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고종 36년, 광무 3년) 9월 1일 청선군주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헌경왕후로 추존되면서, 9월 21일 이와 관련된 인물들의 작위도 모두 격상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청선군주는 청선공주로, 남편 정재화는 흥은부위에서 흥은위로 각각 추증됩니다.

현재 청선공주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으며 원래는 재실 등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6.25 전란으로 인해서 타고 없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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