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군주(1754년~1821년)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장녀로, 정조의 친동생이자 청선군주의 언니입니다. 1754년(영조 30년) 7월 14일, 당시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그녀를 낳았습니다. 원래 청연군주의 출산 예정일은 6월이었으나, 달을 넘기는 바람에 어머니인 한산부부인 이씨가 급히 입궁하여 대궐에서 50여 일을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해 7월 14일에 내 청연을 낳으니, “영조께서 ‘백여 년 만에 군주(郡主)가 처음 나니 귀하다’ 하시며 기뻐하시더라. <한중록>” 이는 숙종이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에게서 공주 둘을 얻었지만 둘 다 일찍 세상을 떠났고, 경종이나 영조는 왕비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영조의 차별이 드러나는데, 청연군주와 같은 해 2월에 태어난 은언군을 비롯한 사도세자의 서출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영조는 청연군주에 대해서는 어릴 적에 역질을 앓았다가 회복했을 때도 직접 보러 왔고, 그녀가 혼인하여 일가를 이룬 뒤에도 애정을 보이며 종종 사저에 들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청연군주는 세자의 딸로서 공주가 아닌 정2품에 해당하는 군주로 불렸는데,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상태에서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기에 공주가 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오빠인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친부인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죽는 날까지 ‘청연군주’로 살게 됩니다.
1765년(영조 41년) 음력 윤2월 2일 참의를 지낸 김상익의 아들 김두성과 정혼하고, 음력 4월 11일에 혼례를 거행했습니다. 김두성은 훗날 김기성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군주와 혼인하여 광은부위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조가 남긴 존현각일기를 보면 청연군주의 시아버지인 김상익에 대한 좋은 평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홍인한과 정후겸이 겨루는 형세를 관망하다가 권세를 독점할 생각을 한 사람으로 보고 있고, 정조가 왕세손으로 있을 때 “대리청정을 할 때 차대(次對)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고…”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김상익은 청연군주를 며느리로 들이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지만, 이조참의, 전라도관찰사 재임시 부정과 탐욕이 많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을 정도로 그의 인물됨은 좋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결국 그는 정조 즉위년에 홍인한·정후겸 등의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것으로 양사의 집요한 탄핵을 받았으며 정조의 비호로 대사헌에 기용되기도 했지만, 결국 1777년(정조 1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고 4년 후에(1781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영조 49년(1773년) 봄, 당시 20세이던 청연군주는 동생 청선군주(당시 18세), 궁녀 덕임(당시 21세, 훗날 정조의 후궁 의빈성씨), 그리고 영희, 경희, 복연 등 궁중 여인들과 함께 <곽장양문록>을 필사했습니다. 이는 당대 왕실 여성들의 취미 생활이 독서와 필사였기에 청연군주를 중심으로 작업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후일 오빠인 정조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라고 알려진 성덕임(의빈성씨)은 당시 혜경궁 홍씨가 아끼던 궁녀로, 혜경궁의 딸들인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친분이 있었기에 필사를 함께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의빈 성씨가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씌어있으며 영희, 경희, 복연이라는 궁녀들은 혜경궁 처소의 궁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1773년이면, 필사를 주도했다는 청연공주와 청선공주 모두 혼인하여 사가에서 살던 시기인데, 어떻게 궁녀들과 10권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필사했는가는 의문점으로 남습니다.
이 책은 본래 낙선재 혹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낸 국어학자 방종현(1905~1952)의 호가 찍힌 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6.25 전쟁 전에는 서울대학교에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이후 6.25 전쟁 중에 민간에 유출되어 부산으로 흘러들어갔고, 1968년~1969년 무렵에 부산의 한 고물상이 그 가치를 모르고 전부 뜯어 병풍으로 쓰려던 것을 고서 수집가 홍두선이 다행히 발견하여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무렵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의 분관인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전시 중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 바로 옆에는 정조가 즉위식을 한 경희궁이 있는데, 정조의 후궁과 여동생들이 필사한 소설이 그가 거처했던 경희궁 옆에 있는 박물관에 기증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청연군주는 남편과의 사이에 7남 2녀의 자녀를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요절한 자녀들이 많았으며, 그중 2남 1녀만 성인으로 성장하는데 훗날 1795년(정조 19년) 정조가 수원화성으로 대규모로 능행을 할 때, 그녀의 두 아들도 동행한 외빈 명단에 있었습니다.
청연군주의 장남 김재창은 이조판서와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차남은 김재삼으로 음보로 벼슬길에 오른 후 의주부윤 등을 역임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청연군주는 1821년(순조 21년) 음력 6월 9일 향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녀는 혜경궁 홍씨의 자녀 중 유일하게 어머니보다 오래 산 자녀입니다. 청연군주가 죽자 조카인 순조는 매우 슬퍼하며, 군주의 장례를 특별히 해당 관청에서 거행하게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고종이 대한제국을 개창하면서,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장종의 묘호를 올리고 혜경궁 홍씨에게 헌경왕후의 시호를 올렸습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의 딸인 청연군주도 청연공주로 추증되었으며, 이때 남편 김기성도 광은위로 진봉됩니다.
1963년 경기 광주 세촌면 암동리의 청연군주 부부의 합장묘를 이장하던 중 복식과 부장품이 약 200여 점에 이르는 부장품이 출토되었습니다. 이중 청연군주 노의는 우리나라 복식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유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노의는 왕비, 세자빈, 대군의 정실인 부부인, 왕자의 정실인 군부인 등 4품 이상의 정처의 예복이며 계급에 따라 색이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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