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완옹주(1737년~1808년)는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의 딸로, 이름이 용완(蓉婉)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머니는 찬성에 증직된 이유번의 딸인 선희궁 영빈 이씨입니다.
1737년(영조 14년) 1월에 태어난 화완옹주는 영조의 12명의 딸 가운데 아홉째 딸로 태어났으며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는 1남 6녀 가운데 막내였습니다. 그녀의 친형제 가운데 3명의 언니가 일찍 죽어 1남 3녀만이 남았는데, 친언니가 화평옹주, 화협옹주이고 친오빠가 바로 세자인 사도세자였습니다.
화완옹주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영조의 총애는 큰언니인 화평옹주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화평옹주는 성품이 유순하여 부모·형제들을 잘 보살폈는데, 22세가 되던 1748년(영조 24년) 하가하여 살던 사저에서 난산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영조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당시 화완옹주의 또 다른 언니인 화협옹주도 혼례 후 하가하여 궁을 떠난 상태였기에 화평옹주에게 쏠려 있던 총애가 화완옹주에게 쏠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49년(영조 25년) 12세의 화완옹주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낸 정우량의 아들인 일성위 정치달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당시 예법상 혼례를 치르면 궁을 나가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영조는 화평옹주 때와 같이 예외를 적용하여 그녀를 한동안 계속 궁 안에서 살게 합니다.
영조의 맏딸인 화평옹주는 아버지가 자신을 편애하는 것에 대해 동생들에게 늘 미안해하며 사랑받지 못하는 동생들과 아버지 사이를 현명하게 중재하려고 했던 것에 반해, 어린 시절의 화완옹주는 영조의 사랑을 양보하려 하지 않아 남매 사이에 갈등을 유발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지나친 편애 때문에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 것이 마냥 좋은 상황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만한 눈치가 생겼고, 남편인 정치달도 화완옹주에게 영조의 사랑을 형제들과 나누라 조언하게 됩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서는 영조가 사도세자보다 자신(화완옹주)을 더 편애한다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다는 정치달의 언급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가한 후 화완옹주는 남편뿐만 아니라 형제들과도 원만하게 지냈는데, 특히 사도세자와의 관계에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1756년(영조 32년) 화완옹주는 첫 아이인 큰딸을 낳게 되었고, 이에 기뻐하게 됩니다. 영조는 화완옹주의 해산 소식을 듣고 버선발로 달려갈 정도였지만, 그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듬해 1월 그녀의 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에 영조는 화완옹주가 큰 슬픔에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옹주를 궁으로 데려와서 보살폈다고 합니다. 그런데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2월 중순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그날 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 서씨가 세상을 떠나지만, 영조는 왕비의 빈소를 지키지 않고 사별한 딸을 위로하기 위해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갑니다. 이는 나라의 국모인 왕비의 죽음보다 일개 옹주를 더 중요시한 것인데, 화평옹주 때도 그랬지만 정말 유별난 딸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신하들이 경악하며 영조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늘어지는 수준으로 격렬하게 행차를 반대했지만, 끝내 영조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됩니다. 이후 영조는 남편과 딸을 한꺼번에 잃은 화완옹주를 보살피기 위해 그녀를 궁에서 살게 합니다.
이듬해인 1758년(영조 34년) 1월 17일, 영조의 차녀이자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화순옹주마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화순옹주는 남편인 월성위 김한신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도 월성위를 따라가겠다며 음식을 끊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영조가 달려가 아버지의 명령이라며 화순옹주의 단식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는 14일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자식을 잃고 나자 영조는 화완옹주에게 더 큰 애정을 쏟기 시작합니다.
화완옹주가 환궁하여 궁에서 살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세자에게 어려서부터 매우 엄했는데, 부자 사이는 점차 멀어져서 나중에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 지경에 이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가 안쓰러운 마음에 화완옹주를 더 편애하자 사도세자는 노골적으로 질투의 감정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화완옹주에 대하여 “저는 자애를 극진히 입고 나는 어이 이러한고”라고 한탄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커가면서 이러한 사실을 눈치챈 화완옹주는 친오빠인 사도세자를 위해 영조와 세자의 중간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영조와 떨어져 살고 싶어 하는 사도세자를 위해 영조의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옮기게 하였고, 습창이 나서 고생하던 사도세자를 온양온천으로 떠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자 사이는 끝을 달리고 있었고, 결국 1762년(영조 38년) 윤 5월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일부에서는 “임오화변”에 화완옹주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과 <한중록> 등 비교적 당대에 쓰인 사료에는 화완옹주가 “임오화변”에 개입한 흔적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중록>에서는 화완옹주가 후에 세손에게는 괴상히 굴었지만, 사도세자의 일에는 스스로 몸을 다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흔히 각종 소설,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화완옹주가 정치적인 이유로 오빠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사도세자 사후에는 조카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완옹주의 남편의 가문은 사도세자와 친밀했던 소론이었으며 당사자인 옹주와 사도세자와의 관계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화완옹주를 싫어했던 혜경궁 홍씨도 <한중록>에서 그 점만은 명확히 합니다.
조선 최고의 비극 중 하나인 “임오화변”이 일어난 이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영조의 후계자가 됩니다. 그리고 영조는 곧바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세손을 영조의 큰 아들이자 요절한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을 시킵니다.
그리고 세손의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옮겨 할머니인 영빈 이씨와 함께 생활하게 하였는데, 1764년(영조 40년)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고모인 화완옹주와 함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전히 영조의 편애를 받고 있던 화완옹주는 어린 조카인 세손(정조)을 잘 보살펴 주었지만, <한중록>에 따르면 때때로 도가 지나쳐 정조를 자신만이 소유하기를 원하였고 정조 주위의 모든 것에 질투를 느꼈다고 합니다. 심지어 조카며느리이자 세손의 부인인 효의왕후(당시에는 세손빈)에게 시어머니 노릇까지 하면서 심하게 구박을 했습니다.
이러한 극성스러운 고모 때문에 효의왕후는 세손빈 시절에 정조와 금슬이 좋지 못했습니다.
또한 정조가 세손빈을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장인과 처남(효의왕후의 친정 아버지와 형제)을 좋아해 측근으로 두자 옹주는 이를 질투해 세손빈의 친정까지 흉봤다고 합니다. 이후 좋아하고 따르던 장인이 사망해 정조가 슬퍼하자 화완옹주는 세손이 아버지를 잃은 세손빈을 불쌍하게 여겨 잘 대해줄 것을 우려합니다. 이로 인해 세손빈의 부친상이 뭐가 그렇게 큰일이냐는 도를 넘어선 언행을 보였고, 참다못한 혜경궁이 화완옹주를 야단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런 기록은 혜경궁이 쓴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본인이 시누이를 싫어해서 이러한 글을 남겼을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기록이 혜경궁의 조작이라기엔 내용이 좀 심상찮은 게 사실입니다.
화완옹주는 오빠인 사도세자가 죽은 뒤 아직 어린 세손(정조)을 옆에 끼고 살면서 음식부터 입고, 신고, 노는 것까지 죄다 챙겼다고 합니다. 심지어 엄연히 세손과 옹주라는 신분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와 함께 겸상까지 합니다.
그나마 친어머니인 영빈 이씨가 있을 땐 어느 정도 행동을 자제했지만, 그녀가 죽고 난 뒤에는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던지 더욱 조카에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집착증은 영조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어서 아버지로부터 편집증을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화완옹주의 조카를 향한 비정상적인 애정은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어린 세손인 정조에게 부담이 되었고, 남편과 사별한 혜경궁 홍씨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누가 봐도 화완옹주의 행동이 지나쳤지만, 그녀가 워낙 영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다 보니 혹시나 그녀의 심경을 거스르면 영조의 질책을 받아 잘못될까 봐 세손의 친모인 혜경궁조차 나서질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청소년으로 성장한 정조가 송나라 역사서인 <송사>를 편집한다고 초고를 쓰는 데 몰두하자 옹주는 책인 <송사>를 시샘했고, 세손이 궁녀를 좀 맘에 들어 한다 싶으면 반드시 훼방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정조가 사춘기를 거치게 되면서 고모의 간섭이 싫었는지 그녀를 점점 밀어내면서 그 둘의 사이는 점차 멀어져 갑니다.
한편 일성위 정치달이 죽은 후 화완옹주는 정치달의 친척인 정석달의 아들 정후겸을 양자로 들입니다. 정후겸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능이 있고 배짱도 두둑했는데, 화완옹주의 아들이라는 후광까지 더해져 영조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16세가 되던 1764년(영조 40년)에 장원서 봉사에 임명되었고, 2년 후인 1766년(영조 42년)에는 별시에 합격하여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할 여건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어 정후겸은 수찬과 승지를 거쳐 21세에 개성부유수로 임명되는 초고속 승진을 하였는데, 이 모든 것이 화완옹주와 영조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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