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서 정후겸은 조정 내에서 또 하나의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고, 이 세력은 당파들과 결탁하여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세력을 위협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갑니다.
영조의 편애를 받으며 화완옹주와 그의 양아들 정후겸이 궁궐 내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가운데 영조의 몸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이에 영조는 1775년(영조 51년) 10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고, 이 사실을 화완옹주에게도 알립니다.
그런데 대리청정은 매우 미묘한 문제였습니다. 대리청정을 섣불리 받아들였다가는 사사로이 왕위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대리청정을 받는 사람은 이를 우선 거절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왕이 거듭하여 명령을 내리고 주위에서도 거듭하여 요청을 하면 어쩔 수없이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연출한 후 대리청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왕의 진심을 잘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였고, 왕 또한 자신의 진심을 분명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영조가 자신의 대리청정을 화완옹주에게도 알렸기에 문제가 됩니다. 당시 궁궐 내에 실력자로 부각되었던 화완옹주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세손이 대리청정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가 결정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 영조가 대리청정 의사를 밝혔을 때 그녀는 대리청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영조의 마음이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겠다며 한발 물러서게 됩니다. 이로 인해 신하들 중 그 누구도 대리청정의 진의를 판단할 수 없었고, 당연히 대리청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도 애매해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화완옹주는 대리청정을 시작으로 왕위 계승을 하려는 영조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방해를 한 것은 정조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주장도 있습니다. 나중에 머리가 굵어진 정조가 고모의 간섭을 싫어하기 시작하자 빈정이 상해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조실록>에서는 대리청정을 방해한 화완옹주의 행동이 양아들 정후겸의 입김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정후겸은 널리 심복들을 배치하여 세손의 일거수일투족을 탐문하였고 화완옹주는 세손에게 전해지고, 세손이 보내는 문서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정후겸에게 전해주었기에 당시 세손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영조는 그 해 11월 다시 한번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후겸과 뜻을 같이한 영의정 한익모와 혜경궁 홍씨의 작은아버지인 좌의정 홍인한 등이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했습니다.
이후 세손의 친위세력인 홍국영의 부탁을 받은 부사직 서명선이 탄핵 상소를 올려 영의정 한익모와 홍인한의 처벌을 주장하자 영조는 그 뜻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12월 7일 드디어 세손의 대리청정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게 됩니다.
1776년 3월, 세손이 대리청정을 수행한지 3개월 만에 영조가 83세의 나이로 승하하면서 정조가 25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됩니다. 조카인 정조의 즉위로 화완옹주의 입지는 매우 위험하게 됩니다. 영조가 살아있을 때 화완옹주와 양아들 정후겸은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정조의 반대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조가 대리청정을 하며 왕권을 이어 받기 위한 수순을 밟을 때 정조의 행보를 끝까지 방해했었기에 숙청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즉위 직후 정조는 영조 대에 당여를 맺고, 권세를 농간하였으며, 임금에게 모함과 훼방하는 말 등을 떠벌려서 세손(정조)을 동요시키려 하였다는 죄를 들어 화완옹주의 양아들 정후겸을 경원부로 귀양 보냅니다.
이때 화완옹주도 처벌하여야 한다는 상소들이 올라왔으나, 정조는 화완옹주가 이미 궁을 떠나 사저로 나갔기에 더 이상 논하지 말라며 옹주를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어 정후겸과 홍인한이 내통하는 사이였다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오면서 결국 홍인한 또한 여산부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해 7월 정조는 정후겸과 홍인한을 사사하고 <명의록>을 편찬하여 대리청정을 둘러싼 그동안의 과정을 서술하도록 했습니다.
이후에도 조정 대신들은 끊임없이 화완옹주의 처형을 요구하였고, 결국 이듬해인 1778년(정조 2년) 윤 6월 정조는 화완옹주의 작호를 삭탈하고 강화도 교동부에 옹주를 안치하는 것으로 처형을 대신하게 됩니다.
이후 화완옹주는 더 이상 옹주가 아닌 ‘정치달의 처’ 혹은 ‘정처’로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화완옹주는 유배지를 육지인 경기도 파주로 옮기게 되는 등 유배 기간 동안에 정조의 배려를 받으며 큰 어려움 없이 지내게 됩니다. 심지어 유배지를 이탈해 돌아다녀 논란이 되지만, 이 또한 정조가 무마해 주게 됩니다.
그리고 정조가 승하하기 1년 전인 1799년(정조 23년) 3월, 정조가 전교를 내립니다. “진위 여부가 애매모호한데, 죄안(범죄 사건의 기록)은 아직도 있기 때문에 오늘 반드시 사유(특별사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정치달 처(鄭致達妻)의 죄명을 없애고 특별히 완전히 용서하여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펴는 방도로 삼겠다.”라며 화환옹주의 죄명을 없애고 그녀를 석방하게 됩니다.
대신들은 펄쩍 뛰며 정조가 대리청정을 받을 때 방해하던 역적들의 배후가 화완옹주라며 그 명을 거두어 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으나 정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순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대신들은 여전히 화완옹주를 탄핵하였지만,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명이라며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정조와 순조의 비호 속에 목숨을 부지하였던 화완옹주는 1808년(순조 8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왕실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졸기(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가 없는 것으로 볼 때 끝까지 옹주의 신분으로는 복권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순조실록>에서도 정처, 정치달의 처로만 기록이 되어있으며 1808년(순조 8년) 5월 17일 “삼사에서 정치달의 처가 물고(죄를 지은이가 죽음)되었다. 하여 합계(죄를 논하여 올리는 글)를 정지하다.”라는 기록으로 그녀의 죽음을 알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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